도서관은 식사하거나 차를 마시기 좋은 곳이 아니다. 도서관의 기본 기능은 책을 읽는 데 있으니까. 그리고 책은 기본적으로 잉크와 나무 향으로 차 있어 다른 향이 섞이면 악취가 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도서관은 식당을 운영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곳이다.
이전에, 이 근처에 살았던 형님이 내가 빌린 작업실에 들렀다. 형님은 차를 마시면서 옛 완산도서관 지하에 식당이 있었고 밥 먹고 난 이후에 예쁜 여자애들 있나 두리번거렸다고 한다. 우와 그런 시절이 있었군요- 하고 끄덕였다. 형님이 돌아가고 난 뒤 나는 1층에서 도서관에서 커피/음료와 김밥을 먹는 사람들을 보곤, 갑자기 먹고 마시는 이야기가 쓰고 싶어졌다.
(도서관에 관련된 책들을 읽고 나서 보니) 전주시를 포함, 한국과 일본, 영국, 독일의 도서관에는 카페 기능을 도입한 도서관들을 시범 삼아 운영하고 있는데, 전주시야말로 효시가 될 만하다. 송천, 꽃심, 평화도서관은 장애인들이 직원으로 일하는 ‘아이갓에브리띵’ 카페를 운영하는데, 생각보다 음료 맛도 좋을뿐더러 쉼터로 있기도 좋다. 책 한 권과 차 한잔은 꽤 잘 어울리지 않은가. 물론, 도서관이 수다를 떨기 좋은 곳은 아니지만.
나는 완산도서관 입주 작가이니 완산도서관만 얘기하겠다. 대체로 오전에 도서관이 개관하면, 각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한 10분쯤 지나면 각자 가져온 물통이나 컵으로 정수기를 향한다. 또는 1층 커피자판기를 찾는다. 지난 8월에는 자판기를 전혀 사용을 안 했다. 그러다가 이달 아침에 문득 한번 커피를 마셔보고 싶어 자판기로 뽑아 마셨는데, 생각보다 괜찮다. 도심 속 허겁지겁 음료를 내리는 소규모 카페보다 음료를 훨씬 맛있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옆의 이경옥, 최기우, 김근혜 선생님도 동의하신 것을 보면 기계의 커피 내리는 솜씨가 많이 발전했다. 거기다 가격도 싸다. 2024년 상반기는 고물가로 얼룩졌는데 2천 원 커피가 남아있는 건, 아스팔트 가득한 도로 중앙에 꽃밭을 보는 것만큼 기적이다. 휴일에 보면 간식을 들고 자판기 커피 앞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주 큰 소리만 내지 않으면 아름다운 정경이다.
완산도서관에서 걸어서 내려가니 (내 걸음으로) 약 2분이다. 거기서 인근 동완산동이나 서서학동에 있는 카페로 가는 것은 대체로 5분에서 15분 정도 걸린다. 8월과 9월, 걷고 있자면 옷과 살 사이에 땀이 맺히는 것이 느껴지고, 열풍은 땀을 더 재촉해 카페에 도착하면 탈진해서 의자에 널브러지게 된다. 그렇게 두세 번 나갔다가 포기했다. 그렇다고 자동차를 끌고 나가기도 번거로울뿐더러, 주차공간이 부족한 이곳에서 나갔다가 주차 못하고 걸어오는 걸 생각하니, 아이고… 아찔하다. 9월이라도 낮이면 34도까지 치고 오르니 10월에나 카페 산책하러 나갈 것 같다. 덧붙이자면, 내가 갔던 카페의 이름은 디드 꽃동산점(동완산동) / 하임(동완산동) / 광커피 로스터리(서서학동) /잇애니띵(서서학동) / 남부시장 2층 청년몰 내 혜미당이었다.
이렇게 밖에서 커피를 마시고 바람을 쐬면 도서관으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다. 지난 8월의 각오가 무색하게 “도서관 가봤자 또 글 쓴다고 낑낑거리면서 고민만 하다가 침잠할 것 같은데… 오늘은 땡땡이칠까” 이렇게 중얼거리니, 게으름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 게으름과 싸우는 것은 평생 각오를 해야 한다.
결국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그리고 돈도 좀 절약하고자) 내 작업실에서 차를 내린다. 이전에 선물 받거나 사 놓은 홍차와 우롱차, 보이차를 놓고 마신다. 이전 글에는 도서관에 오자마자 문을 열고 어슬렁거린다고 썼는데, 요즘은 문을 열고 주전자에 물부터 채운다. 부엌에서 물 담기는 소리를 들으면 잠이 서서히 깨는 기분이다.
물론 커피도 있지만… 난감하고 기쁜 상황을 마주했다. 나는 예전에 카페에서 오래 알바를 했는데 그때 알게 된 형과 누나들이 지금 카페를 한다. 이분들이 지난달에 작업실에 놀러와 축하한다고 원두를 한가득 줬다. 원두가 적으면 괜찮지만 이렇게 많을 때는 차보다 보관이 까다롭다. 분쇄된 커피의 향은 금방 사라지고,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면 하루가 엉망이 된다.
그래서 지난달과 이달 아침과 점심께 작가님들을 만나면 커피·차를 나눠 마셨다. 처음에는 드립커피만 마시다가 우유와 설탕도 넣게 되었다. 가장 맛있게 마시는 커피의 맛도 알게 되었다; 수 다 떨며 마시는 음료가 가장 맛있고 편안하다. 수다라고 해봤자 보통은 작품 얘기인데, 8월에는 “왜 이렇게 안 써질까요”가 가장 많았다. 창작 고민의 결은 누구나 비슷한가 보다. 요즘은 “쓸 것은 정해졌는데 진도가 안 나가네요”라고 한다. 이래저래 다들 흔들리면서 전진하고 있다.
어쩌다 오후에도 작업실에(주로 토요일) 불이 켜진 작가님 방을 찾아 커피 또는 차 한잔 대접하고 싶다고 부르기도 하는데, 보통은 옆 방의 이동한 형님만 부르게 된다. 형님은 입맛이 높아 매번 만들 때마다 슬쩍 긴장되는데, 다행히 차건 커피건 잘 드셔주셔서 감사하다.
오늘, 이 글을 쓰는 아침은 다소 더웠지만 완산칠봉으로 머그컵을 들고 나갔다. 여름의 열기 사이로 가을의 서늘함이 줄기와 잎으로 번지는 것을 보며 우롱차 한 모금을 넘겼다. 이곳은 이전에 사형터였고, 왕실의 산림이었으며, 한국전쟁의 방어기지기도 했고, 지금은 도서관이 되었다. 나는 작은 종이컵에 차를 담아 벤치에 올리고 작은 차례(茶禮)를 올렸다. 한때 이곳에 있었던, 그리고 이곳에 오고 가고 머무는 이들이 평안하기를.